[창간특집] 대한민국 체육 100년 명장면② 첫 올림픽 개최, 신흥 체육 강국으로 부상

[창간특집] 대한민국 체육 100년 명장면② 첫 올림픽 개최, 신흥 체육 강국으로 부상

  • 기자명 이상민 기자
  • 입력 2019.11.21 15:28
  • 수정 2019.11.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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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모(오른쪽)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해 레슬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대한민국 첫 번째 금메달이다.(사진=연합뉴스)
양정모(오른쪽)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해 레슬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대한민국 첫 번째 금메달이다.(사진=연합뉴스)

[데일리스포츠한국 이상민 기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한국이 올림픽 금메달을 손에 넣기까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첫 출전한 이후 28년의 세월이 걸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이후로는 무려 40년만이다.

주인공은 레슬링 양정모. 그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우승하며 대한민국이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땄다.

앞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적이 있지만 당시 시대의 아픔 속에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기에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금메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정모가 금메달을 따내며 올림픽 경기장에서 첫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한국 스포츠는 수많은 최초를 만들어냈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최초는 양정모의 금메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발전한 한국을 세계에 알린 <서울 올림픽 개막>

한국은 개발 도상국 최초로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다. 그리고 이는 대내외적으로 한국의 성장을 이뤄낸 초석이 됐다. (사진=대한체육회)
한국은 개발 도상국 최초로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다. 그리고 이는 대내외적으로 한국의 성장을 이뤄낸 초석이 됐다. (사진=대한체육회)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우리나라 스포츠에 큰 영향을 끼친 대회다. 체육계뿐 아니라 경제 등 대외적으로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빈곤 국가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직접 개최하며 전 세계에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는 것을 알렸다.

당시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해 역대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미국과 소련이 같이 참가한 것이 컸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시대가 계속됐는데 서울 올림픽을 시작으로 점차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또한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는데 한국은 개발도상국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 이후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를 하거나 문화 교류를 넓혀 나갔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도 세계 열강의 지위를 굳힐 수 있는 계기와 바탕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성적도 좋았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따내며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종합 4위를 차지했다. 특히, 양궁 김수녕은 한국 선수로는 올림픽 최초로 2관왕에 올랐다. 여자 핸드볼팀은 구기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밖에 탁구, 레슬링, 유도, 복싱 등에서 여러 메달을 따냈다. 이때 메달을 기록한 종목들은 향후 우리나라의 효자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IMF시절 희망과 용기를 준 '박찬호&박세리'

'박남매' 박찬호(왼쪽)와 박세리는 IMF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사진=연합뉴스)
'박남매' 박찬호(왼쪽)와 박세리는 IMF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사진=연합뉴스)

박찬호와 박세리는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겪던 시절 국민 박남매로 불린 영웅들이다. 먼 타국 땅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며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

한양대에 재학 중이던 박찬호는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이후 혹독한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97년부터 선발투수로 활약, 2001년까지 5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뒀다. 이 같은 성적 바탕으로 2002년 FA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2010년까지 꾸준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다. 17년 간 활동하며 아시아 최다승(124승)과 최다이닝(1993이닝) 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일본과 한국을 거쳐 2012년 공식 은퇴했다.

박세리는 한국 여자골프의 선구자로 꼽힌다. LPGA투어에 데뷔한 지 7개월 만인 1998년 5월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올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골프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또 다른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해 LPGA 올해의 신인왕과 AP통신 올해의 여자 선수상을 수상했다. 특히 US여자오픈 연장전에서는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 트러블샷을 극적으로 성공시켰던 이른바 맨발 투혼으로 전 국민의 감동을 자아내며 대회 최연소 승리를 이뤄냈다.

2002년에는 LPGA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만 24세 9개월의 나이로 최연소 메이저 4승을 기록했다. 이후 2007년 6월에는 아시아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고, 그해 7월 KLPGA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0년 남북이 최초로 공동입장한 <시드니 올림픽>

남북은 분단 후 최초로 올림픽에서 손을 맞잡았다. (사진=대한체육회)
남북은 분단 후 최초로 올림픽에서 손을 맞잡았다. (사진=대한체육회)

남북한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분단국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공동입장을 이뤄냈다. 이는 2000년 6월 15일 진행된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형성된 남북 화해의 정신을 바탕으로 추진됐다. 한국 선수단은 여자 농구 정은순이, 북한 선수단은 남자 유도 박정철이 기수로 선정돼 같이 한반도 기를 들었다.

남북은 2000년 최초 공동입장 이후 2007년 창춘 동계아시안게임까지 9차례 공동입장 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공동입장이 무산되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공동입장의 맥이 끊겼다. 이후 11년이 지나서야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다시 손을 맞잡았다.

남북한의 공동입장 시에는 코리아(KOREA)란 이름으로, 행진곡풍으로 편곡한 민요 아리랑에 맞춘 입장이 이뤄지고 있다. 또 흰색 바탕에 하늘색으로 우리나라의 지도가 그려진 한반도기가 남북 공동입장 때마다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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